본문 바로가기
  • 보고 듣고 쓰는 것들에 관하여
본 것

플래시도 좋았고, 슈퍼걸도 좋았다. <더 플래시> 약스포-

by 작가 전성배 2023. 6. 19.
반응형

얼마 만에 즐겁게 본 히어로 무비인지 모르겠다. 최근 붉어진 에즈라 밀러의 기행은 차치하고 오로지 영화만을 두고 이야기하면, 플래시에 어울리는 배우로서 그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연기력은 탁월했다. 비유하자면 이 사람이 내게는 울버린의 휴 잭맨, 데드풀의 라이언 레이놀즈,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고나 할까.

드라마 <시크릿 가든>&nbsp; 속 한 장면. 극 중 김주원이 스턴트 연기 중인 길라임을 멈춰 세우고는 주변 스태프들에게 이렇게 소개한다. "저한테는 이 사람이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

이 외에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플래시의 고속 액션, 전대 배트맨의 경건한 마음마저 들게 하는 대사와 액션, 이게 진짜 여성 히어로지! 싶은 슈퍼걸의 매력까지. 오랜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봤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분명히 말한다. 최근 개봉했던 <스파이더 맨 노웨이 홈>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를 빼고는 연신 한숨만 나오는 히어로 무비 시장에서 <더 플래시>는 한줄기 빛 같은 영화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건 맨 마지막에 이야기하겠다.

 

에즈라 밀러의 괴리감 없는 1인 2역

앞에서 했던 비유가 누군가에게는 지나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울버린과 아이언맨의 배우는 해당 히어로를 오랫동안 연기해 온. 그야말로 이제는 히어로 그 자체가 된 사람들이니까. 에즈라 밀러는 그들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들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 유머에 생기를 불어넣는 억양과 표정이 일품이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1인 2역을 너무도 잘 해냈다.

1인 2역이라는 건 더 많은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묘수 같은 장치이면서, 그런 만큼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장치다. 결국 한 사람이 연기하는 거라는 걸 관객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니까. 관객은 1인 2역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화는, 배우는 이 노골적인 거짓말을 관객에게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는 추가적인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어야 하는 것들 이 참 많은데 번외로 또 미션이 생긴 격. 못하면 욕을 먹고 잘하면 응당 그래야 한다.

 

설득하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다.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의 캐릭터성을 각각 부여해 연기를 한다던가, 아예 분장을 달리해 외적으로라도 같은 사람인 걸 못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에즈라 밀러의 플래시는 전자를 선택한다. 이전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플래시는 수다스럽고 아직은 서툰 히어로 이미지가 강했다.

<저스티스 리그> 속 플래시

마블로 치면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 맨과 같다. 그리고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 맨이 2편과 3편을 거치며 성장을 했듯 이번 <더 플래시>에서 에즈라 밀러의 플래시도 저스티스 리그 때보다 훨씬 성숙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전히 수다스럽지만 그 말수가 현저히 줄었고, 행동은 정돈됐다. 저스티스 리그 땐 줄곧 스트리트 패션을 고수했으나 더 플래시에서는 취업을 해서인지 비지니스 캐쥬얼룩으로 바뀌기도 했다. 이 모두가 마치 어떻게든 과거의 플래시보다 더 성숙해졌다는 걸 보여 주려는 듯 말이다.

그런 플래시가 과거의 비극을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어쩌면 저스티스 리그 때보다 더 수다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어린 플래시 즉 어린 배리 앨런이 있었다. 머리 스타일은 현재의 짧은 머리가 아닌 장발의 파마 머리. 동일한 시간선에서 조우하게 된 미래의 배리 앨런과 과거의 배리 앨런의 외적 차이는 딱 거기까지였다. 얼굴도 똑같고 복장도 둘 다 캐쥬얼이었다. 차이를 줄 수 있는 거라곤 이제 연기력밖에 없어 보였다.

 

에즈라 밀러는 어린 배리를 갓 능력을 얻어 설렘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연기한다. 그러면서 사랑은 충만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열정적인 인간으로 연기한다. 어른 배리는 그런 어린 배리에게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하는 어른으로 연기한다. 형처럼 때론 스승처럼. 때에 따라 역할을 달리하며 어린 배리를 성장시키는 한편 어린 배리의 세상을,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세상을 지키는 그야말로 히어로 다운 모습을 연기했다. 어린 배리는 어른 배리를 통해 능력과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끝에 가서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관철하는 두 배리 앨런을 보면서는 에즈라 밀러의 능력에 감탄했다.

플래시의 액션

DC에 플래시가 있다면 마블에는 퀵 실버가 있다. 둘 다 고속 이동 능력을 가진 일명 '스피드스터' 히어로다. 코믹스는 잘 알지 못해 오직 영화를 기준으로 보면 플래시의 능력이 더 우위에 있다. 그는 빛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고, 그렇게 달린다면 시간마저 거스를 수 있으니. 그러나 그간 영화가 표현하는 스피드스터의 액션은 고만고만했다. 화면에 슬로우를 걸어 사고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조한다던가 총알 궤도 바꾸기 혹은 피하기, 빠른 속도를 이용해 악당을 정신없이 때리기 등등 어떻게 보면 다른 히어로에 비해 빈약하고 한정적인 액션을 보여줄 뿐이었다. <더 플래시> 이전까지는.

 

<더 플래시>에서 위에서 말한 액션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다. 스피드스터라면 이제는 국룰처럼 위 액션이 기본으로 나와 할 정도로 위 액션에는 재미적인 요소가 분명있다. 다만 상투적일 뿐. 플래시는 그 액션에 변화를 주었다. 플래시의 전매특허인 주황새의 번개를 적극적으로 활용, 여기에 더해 플래시가 능력을 사용할 땐 일순 주변 환경이 가래떡처럼 늘어지면서 번개와 함께 쏘아지는 플래시의 달리기는 속을 뻥 뚫리게 했다.

마블의 퀵 실버가 별다른 리스크없이 능력을 남용하는 것과 달리 능력을 사용하면 열량을 많이 소모한다는 리스크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배가 고파지면 능력이 약해지다가도 음식을 섭취하면 바로 능력이 회복되는 묘사가 유쾌하다. 이 설정이 액션과 교묘하게 얽히는 장면이 고맙게도 영화 상영 초기에 펼쳐진다. 시작부터 이목을 끌겠다는 심산 같은데 딱 들어맞았다.

 

이 외 두 명의 플래시가 선보이는 액션도 좋았고, 노년의 배트맨의 전성기를 방불케하는 액션도 좋았다. 그 액션은 너무 과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노년의 배트맨이다. 이미 육체적 전성기를 지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액션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실수도 있을 것이다. 장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필요도 있고.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확실히 전성기를 지났지만, 여전히 노련함으로는 전성기 못지 않다는 걸 싸움 도중에 한 실수를 만회하고, 장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증명한다.

이게 바로 여성 히어로

슈퍼걸의 액션은 솔직히 말해 이목을 끌긴 힘들었다. 슈퍼걸 이전에 <맨 오브 스틸>이라는 영화에서 헨리 카빌의 슈퍼맨이 보여준 액션을 그대로 답습했을 뿐. 그마저도 두 플래시의 이야기에 밀려 비중은 더욱 줄었다. 그도 그럴게 영화의 주인공은 엄연히 플래시다. 그들에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슈퍼걸을 연기한 사야 카예의 존재감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적은 분량에서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경이로울 정도로. 대사조차 몇 줄 없다 보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더더욱 많지 않았으나 그 눈빛과 분위기에 압도됐다.

충분한 설득력을 갖춘 등장 배경. 기존 히어로의 힘과 역사를 멸시하지 않는 태도. 과하지 않은 힘의 연출 등 칭찬할 게 너무 많다. 과한 연출을 하지 않았음에도 슈퍼걸의 압도적인 파워를 느낄 수 있던 건 놀라운 부분이다. 말없이 미사일을 한 주먹에 파괴한다던가, 지구를 쳐들어 온 조드 장군에게 1대 1로 맞선다던가.

옆동네 마블이 요즘하고 있는 뻘짓을 생각하면 속이 다 시원하다. “바로 이거지!”. 아이언맨이 수많은 시간을 들여 쌓아온 기술력과 능력들을 처음 보는 배우가 어느 외진 차고에서 구현했다는 설정을 보았을 땐 욕이 나왔다. 그냥 천재이기 때문이란다. 이름은 아이언 하트. 여자 배우가 해서, 흑인 배우가 해서 불만이 아니다. 제작진이 우리가 그토록 사랑한 아이언맨에 대한 존경이 조금도 없다는 것에 화가 난다. 캡틴 마블도 그렇다.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고 지입으로 떠들며 수시로 다른 히어로를 멸시한다. 최근에 개봉한 <토르 : 러브 앤 썬더>에서는 그 멋졌던, 그 늠름했던 발키리는 물론 심지어 주인공인 토르까지 상 멍청이로 만들었다. 이 외에도 <이터널스> <블랜 팬서 : 와칸다 포에버> 디지니로 따지면 <인어 공주> 등등 디지니와 마블이 쌍으로 뻘짓하는 요즘, 플래시는 그냥 다 완벽하다. 히어로 무비가 보여줘야 할 시각적 화려함과 적당한 교훈, 재미, 그것만으로도 좋은데 진정한 여성 히어로의 현신을 보여주었다. 슈퍼걸의 단독 영화가 꼭 나왔으면 한다.

 

아쉬운 점

CG가 다소 부자연스럽다. 전반적으로 양호하나 사람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게임 캐릭터를 보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일부러 그랬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만큼 과장된 부분이 많은데,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지는 않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이번 리뷰는 거의 뭐 플래시를 칭찬하는 내용뿐이다. 혹자는 그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고, 너무 과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이해한다. 서로의 취향이 다른 걸 어쩌겠나. 나는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참 재미있게 봤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