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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기억으로만 전승되는 놀이 "쎄쎄쎄 아침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남산 위에 초가집 짓고 어여쁜 얼굴로 달려갔더니 옆집 순이는 시집을 가고…" "영심이 메롱 영심이, 영심이 짝짝 맞아 영심이…" 이른 저녁 시간에 연인과 방문한 음식점에서 은은히 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초등학생도 안돼 보이는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는 서로 손을 맞잡고 "쎄쎄쎄"를 하며 몇 사람 없는 홀에 까르르 웃음소리를 함께 퍼뜨렸다. 그날 식당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산하기까지 해서.. 더보기
언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 끝이라는 맺음의 글자를 모르듯 말은 계속해서 퍼져 나간다. 사라져 지워지는 것이 아닌 진득하게 뱉어진 말이 공중이라 불리는 바다에 떨어져 희석되어 흩어진다. 그리곤 한 방울의 물로 바다가 되어 부유한다. 말이란 애초에 그러했다. 사람에게서 뱉어지고 모여 오래전부터 또 하나의 바다를 이뤘었다. 인류의 수가 늘어감에 자연스레 언어는 발전했고, 어느샌가 말은 발전에 발전 끝에 무기가 되어 사람을 해치고 살리는 만용까지 벌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더보기
우리를 연결하는 오지랖 "학생 앞을 보고 걸어야지"깜짝. 단호한 어조와 함께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려 정면을 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것이 아닌 인도의 끝을 걷고 있는 나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곧 중년의 아저씨가 옆을 스쳤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안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인도를 벗어났거나 가만히 서있던 구조물 혹은 사람과 부딪혀 다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날은 20살 언저.. 더보기
새벽에 마주한 공중전화박스 하루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겨울 추위 속에서 눈을 떴다. 시간은 새벽 5시 30분이었고, 휴대폰 배경에 띄어 놓은 날씨 위젯에는 '-8도'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그저께만 해도 이 시간에 온도는 영상 10도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틀 사이에 20도에 가까운 온도 차이로 한 순간에 한 겨울이 되고 말았다. 그 날밤 겨울을 얕잡아 보던 나의 말을 들었던 것일까. "12월인데 아직도 최저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지 않다니.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울 거라 .. 더보기
책,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이기주 작가의 신간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 나오자마자 구매해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앞서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은 본업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사는 통에 여가 시간이 없었음에도 이 틀이 채 되기 전에 읽었던 것에 비하면 꽤나 느린 속도로 읽은 것인데, 아마도 앞의 두 권을 책을 단순히 읽은 독서라는 목적 외에도 새로운 자극이나 생각들을 얻기 위한 행동도 포함되었기에 그런 것 같다. 두 권의 책을 .. 더보기
고향의 '향'이 되는 냄새 소란스러운 한낮의 도시는 새벽에도 어김없이 본연의 모습을 발한다. 지치지 않고 불을 밝히는 등대나 꺼지지 않는 가로등은 새벽이 내는 또 다른 빛이라는 소음이다. 낮은 귀를 파고드는 소리에, 밤은 눈을 아득하게 하는 빛에 우리는 쉼 없이 쬐여 어느샌가 지쳐버리곤 한다. 그래서 도시의 발달에 정기를 빼앗겨 빛을 잃은 듯한 깊은 시골의 어둠은 공포보다는 아늑함, 나른함 보다는 안식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특히, 그곳이 가진 그곳만의 향이 되지 못한.. 더보기
이별을 망설이는 인연 이별과 지속 사이에서 물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인연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 앞서, 이별과 이별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마음을 쥐어 짜내는 이들과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본다. 각자 자신의 나이까지 살아낸 사람들에게 나이란 곧 인생의 두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두께는 마음에 겹겹이 쌓여 스스로 정립해둔 사상과 가치관, 성격을 보호한다. 나이가 들수록 성격을 못 굽히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고, 당연히 이런 두께가 쌓일수록 사랑이라.. 더보기
나만의 사랑 법 떠나는 연인의 무거운 발걸음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별 후 버려지듯 남겨지는 이에 대한 연민인 걸까. 아니면 떠난 뒤 언젠가 찾아올 우리가 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적어도 나는 후자이길 바란다. 연민이나 안쓰러움에서 태어난 무거운 걸음이 아니라, 최소한 내가 너를 사랑한 동안 최선을 다했으니 떠난 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를 향한 그리움으로 외로움에 집어삼켜지길 바란다. 외로움에 삼켜진 이는 새롭게 시작할 사랑에 조급해질 수밖에 없.. 더보기
이별 후 다시 재회 하루에도 수 천 수만의 생명이 죽고, 그에 준하는 생명이 태어난다. 이별하는 수만큼의 재회가 있고, 새로운 사랑의 생성만큼 사랑이 소멸한다. 그녀를 만난 남자가 있는 반면, 그녀를 잃은 남자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 불리는 틀은 이렇듯, 의식적으로 모든 것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집착한다. 이런 사실이 마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손익을 저울질하며 어느 한 곳으로도 기울지 않도록 애를 쓰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균형을 잃고 결국,.. 더보기
추석은 모두가 행복할 수 없었다. / 중의적 단어 바깥보다 안이 더 분주한 날. 밖 보다 안의 밀도가 더 높아지고 '남'보다 가족의 유대가 더 깊어지는 날. 바로 명절이다. 일 년에 몇 번 보기도 어려운 먼 가족은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구분만 되어 있을 뿐, 그저 아는 지인 정도에 그칠 만큼 서먹서먹한 관계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명절은, 좋은 핑계가 되어 그들을 한 곳으로 끌어 모은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어찌 됐든 가족이지 않으냐"라는 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