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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왔던 말

언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

끝이라는 맺음의 글자를 모르듯 말은 계속해서 퍼져 나간다. 사라져 지워지는 것이 아닌 진득하게 뱉어진 말이 공중이라 불리는 바다에 떨어져 희석되어 흩어진다. 그리곤 한 방울의 물로 바다가 되어 부유한다. 말이란 애초에 그러했다. 사람에게서 뱉어지고 모여 오래전부터 또 하나의 바다를 이뤘었다. 인류의 수가 늘어감에 자연스레 언어는 발전했고, 어느샌가 말은 발전에 발전 끝에 무기가 되어 사람을 해치고 살리는 만용까지 벌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언어가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닌 모든 것에 시발점인 우리가 그러할 것이다. 결국은 제 얼굴에 침 뱉기로, 제 살을 깎는 일을 벌이는 건 언어가 아닌 그것으로 상대를 해하는 우리일 것이다. 물리적인 상처에는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동정을 가지면서. 우리는 현시대를 살아가며 언어에 의한 통각을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고통은 극적인 공감을 가능케 한다. 누군가의 괴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통을 똑같이 느껴야만 괴로움에 빠진 상대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좀 더 상대에게 효과적인 위로가 되기도 한다. 병마와 싸우는 누군가에게는 함께 병마와 싸우는 사람이 큰 위안이 되고, 그 병마를 이겨낸 사람이 희망이 되는 것도 고통이 공감을 가능케 한다는 것에 근거가 되어준다. 반면, 언어로 상처 입은 사람에게서는 완전한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물리적인 상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고통을 주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는 사람에 따라 상흔의 크기와 깊이가 다르기에 같은 말에도 어떤 이는 가시에 찔리지만, 어떤 이는 칼에 베이기도 한다. 마음은 형태가 없고, 형태가 없는 것은 헤아릴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것은 한정된 육체가 갖는 일정한 법칙의 고통을 벗어나 무수한 경우의 수를 갖는다. 같은 언어로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아도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사라지지 못하는 말이 우리 곁을 부유하는 내내 날을 세운 말은 계속해서 그를 베어낸다. 끝없이 피를 흘리며 그는 말라간다. 


시뷰 / 와카레미치


엄청난 지혜를 이룩한 인류가 이토록 뻔히 보이는 답에서 방향을 상실한 무언가처럼 우매할 정도로 겉도는 걸 보면서, 이것은 의도적으로 무마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 사람은 본인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끝에 끝에서 그 사람이 쓸쓸하게 죽었을 때, 본인이 원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분명, 우린 모두 누군가의 괴로움에 원흉이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는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원흉이 되는 건 필연적이다. 과거에는 지휘를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원흉이 되는 것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권력이나 지휘력을 갖은 사람만의 국한된 만행이 아니다. SNS나 연예 뉴스 기사 밑에 달리는 무수한 댓글, 다양한 사람이 밀집된 군대에서 선임이 후임에게 부리는 온갖 언행들, 회사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언성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린다.


문제의 크기를 임의로 정해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경솔한 것이 없지만, 최근에 SNS에서 언어의 만용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에 인정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공인이었던 연예인들에 한해 벌어졌던 언어의 만용이 이제는 일반인에게까지 퍼져, 얼굴을 가리고 모습을 감춘 불특정 다수에게 이유가 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가 베이고, 생과 사의 경계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까지 보면서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칼을 든 손을 뻔히 들어 보이며 무고한 시민임을 주장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적인 말들과 욕설을 글자라는 이름 아래, 입에서 뱉지 않았다 하여 힘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당사자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쓴다 말할 수 없는 글을 감히 써낸다. 감히 자신이 자신을 감싸며, 스스로의 칼부림을 묵인한다.


입에서 뱉어진 말이든 뱉어지지 않고 활자가 되어 어딘가에 기록되든 언어는 모두 같은 효력을 가진다. 입에서 뱉지 않았다 하여 그 말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누군가에게는 소리가 된 언어건 글이 된 언어건 모두 똑같은 고통이며, 사람의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다는 건 변함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괴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스스로 무마한다. 


시뷰 / 와카레미치


SNS를 예로 만용 하고 있는 언어의 검은 면은 일부 사람들에 국한된 것이겠지만, 모든 것이 하나로 설명된다는 꿈에 이론인 '끈 이론'처럼 오르고 오르다 보면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괴로움이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 사실을 마냥 무마하려 하고 인지 하려 들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아닌, 인정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 더 이상 "고작 그거 때문에 힘들어해" "나 때는 안 그랬어""쟤는 괜찮다는데 너는 왜 그래"라는 식에 타인을 보편적인 존재로 인식하려는 것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 한 명 한 명 단일적인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민족의 한恨과 슬픔을 노래한 시인 김소월이나 시골 소년과 도시 소녀의 순수함을 말하던 황순원, 전설이었던 그를 기리기 위해 숱한 후배들이 그의 언어로 부르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사랑했지만'처럼 언어는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기 위해서, 시대의 풍파 속에서 고요히 싸우고 있던 민족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과거가 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하는 존귀한 것이다.


비판이 아닌 비평으로써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그 뜻을 품어야만 하며, 비하가 아닌 위로가 되어야 하고 모두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품어야만 한다. 원색하고 비아냥적인 부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특별한 만큼 특별한 언어로 소통한다. 응당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특별하게 사용해야만 우리의 가치는 더욱 특별해진다. 




시뷰 / 와카레미치 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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