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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UIT STORY

그녀의 대추

지어진 지 오래된 집부터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집까지. 지붕들이 하나 같이 낮은 키를 갖고 있어 그것들이 가진 색이 훤히 보였다. 파란색의 하늘 아래 진부한 초록의 땅을 무심하게 꾸미던 지붕의 색들은 특별한 감흥을 주지는 않았다. 세월이란 것에 생기生氣라는 이름 아래 색과 견고함과 살점을 담아 건넨 탓일까, 지붕은 드문 드문 기왓장이 빠져 있었고, 남은 것은 예외 없이 이가 빠져있었다. 어느 빈집은 빗장이 마지막 걸음이 언제인 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롭게 기울어져 썩어 있었다.


하지만 이리도 가슴을 시선과 오래도록 머물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뷰 / 와카레미치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부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 시선은 모든 곳에 모든 것을 동시에 보려는 듯 욕심을 한껏 부리며 사방에 이정표를 심고 동선을 따라 걸을 뿐이었다.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 충북 보은은 그런 곳이다. 휘향 찬란한 건물의 향연으로 또는 옛것을 현대의 손길로 윤색潤色한 덕에 고즈넉해진 것들로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도심과 달리, 방생放生을 은덕으로 방인放人이 되는 것을 권유하는 너그러운 곳이었다.


산세가 수려하면서도 강원과 같은 웅장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키 작은 산들의 연속. 인간의 크기를 제법 있음 직하게 대우하는 것 같은 안도감을 안겨주는 곳이었다.


작은 것은 절대 작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곳. 그래서인지 이 곳의 작은 대추는 '보은 대추'라 이름 붙을 만큼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하고 있다. 집집마다 자라고 있는 대추나무와 마당에서 늙어 가고 있는 홍색의 대추가 명산지라 불리는 보은의 자부심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대추는 약용과 식용에 고루 쓰이는 농산물 중 하나다. 따뜻한 성질을 갖고 있으며 단맛이 좋고, 그 크기가 2~3cm 정도로 소과에 속해 부담 없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접근성 때문에, 약재와 약재를 잇는 다리 역할의 '감초'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활용도가 매우 좋다. 한약을 지을 때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약재 감초는 그 성분이 여러 약재의 조화를 돕고, 감초의 단맛이 한약의 쓴맛을 누를 수 있기 때문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대추는 이러한 감초의 역할에 뒤지지 않을 효능과 단맛을 가졌다. 단, 약용이든 생식이든 대량으로 섭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따뜻한 성질의 대추는 평소 열이 많은 사람에게는 좋지 않으며, 당도가 좋다고 설 익은 대추를 먹으면 복통과 설사를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시뷰 / 와카레미치


충북 보은은 밤낮의 기온 차이가 큰 지역으로 오래전부터 대추가 자라는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어 대추의 명산 지라 정평이 나있다. 또 보은 대추의 종자는 속 씨앗이 없는 것이 대부분 이기에 그 인기가 타 산지에 비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보니, 자연스레 제주도 농민이 귤을 키워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면 보은군 농민은 대추를 키워 자식들의 혼인 비용과 의식 문제까지 고루 해결했다고 할 수 있다.


특정 농축수산물이 유명한 산지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생기기 마련인데, 보은 대추에는 "삼복에 비가 오면 보은 처녀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진다."라는 속담이 있다. 6월~7월 사이에 개화開化하는 대추 꽃은 여름철의 삼복과 겹치다 보니, 이때 비가 많이 내리면 대추가 수분을 제대로 맺지 못해 그 해 대추 농사가 흉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 처녀의 혼삿길에 악재가 껴 그녀의 눈에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의 경우, 예년에 비해 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같은 날을 기준으로 작년과 비교해 대추의 씨알이 작고 덜 여문 것들이 많았다. 때문에 작황이 예년보다 못해 농민분들의 걱정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추석 무렵에 전해 듣기도 했다. 정말로 올해는 보은 처녀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질 판국이라고. 하나, 다행인 것은 좋지 않던 날씨 속에서도 대추의 맛은 예년과 같다고 하니, 소비자가 대추 구매를 망설이지만 않는다면 처녀의 눈가에 눈물을 닦아 줄 손수건은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시뷰 / 와카레미치


1년을 기준으로 참 많은 농수산물이 자신만의 때를 맞아 찾아온다. 평생의 약속처럼 까마득한 세월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많은 농민이 그 작은 생명들을 믿고 자식이라는 큰 생명을 길러냈다. 먹이고, 가르치며 한 명의 어엿한 성인으로 출가시키는 것으로 수십 년 동안 출하시킨 작물의 노고에 꽃을 피워낸다. 그래서 대추뿐만이 아니라, 모든 작물이 얄궂은 날씨에 기운을 잃지 않길 바란다. 그들이 풍년이어야 우리가 사는 것이니.


대추를 맛보다.


불빛이 다 죽어버린 밤이었다. 서울과 인천 같은 아니, 좀 더 번화한 지역이라면 상상도 못 할 시간인 밤 11시. 이미 이 곳 보은군 중티리의 빛은 다 죽어 있었다.


내 유년 시절이 그대로 살아 있는 보은군 창리와 달리 주변에 편의 시설 하나 없는 중티리는, 동네에 하나뿐인 정류장과 나루터의 고독만큼 조용한 우물가가 가장 인상적인 곳이었다. 도심의 바람과 달리 산세에 부딪혀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은 가을의 색과 맞지 않는 퍼런색을 띠며 피부를 스치는 곳. 그곳 나무들의 반절에는 대추와 은행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딱딱한 대추 소리가 이른 시간에 죽어 버린 밤을 소란하게 장식하던 시간. 우리는 파란색의 랜턴이 뿜어내는 하얀빛과 유달리 밝던 달빛에 의지하며 걷고 있었다.


시뷰 / 와카레미치


대추나무의 소리를 하나하나 헤아리며 길지 않은 길을 걷고 있을 때, 같이 걷던 긴 머리에 하얀 손을 가진 그녀가 가 무심하게 나무의 대추 한 알을 따 내게 건네주었다. 밤의 색에 어두웠으나 분명 초록의 몸에 홍조를 띤 듯 붉은색이 서려 있던 녀석이었고. 장황한 설명보다는 '맛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나무와 논이 전부였던 중티리에 막힘 없이 퍼져 나갔다. 가까이 있지 않다면 듣지 못할 만큼 힘을 뺀 목소리였으나, 끝도 없이 퍼져 나갔다.


대추가 일으킨 묘한 파동에 가슴이 일렁이던 나는 마음에 손을 얹어 물결을 재우고, 곧 대추의 머리를 한입 깨물었다. 사각 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을 깨울 것만 같아 조심히 또 조심히 씹었다. 이 소리가 잠든 것들을 깨우지 않도록.


퍼런색의 대추도 단맛을 내니 홍색으로 익은 대추는 그것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달다. 하지만 밤에 건네 받은 발그레한 대추는 그들의 중간에 있었다. 시큼함은 빠진 채, 달달한 맛이 과육의 단단함과 함께 입안에서 부끄러움에 주위를 배회하는 소년의 수줍음처럼 맴돌았다.




시뷰 / 와카레미치 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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