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RUIT STORY

'눈의 향'이라 불리는 딸기

첫눈에 이어 두 번째 눈이 내린 어느 날의 아침. 여명黎明이 밝아 온 직후 하늘은 파란색의 압도적인 지배를 받았던 어제를 지나, 점차 청명淸明을 멀리하고 구름을 끌어다 모으기 시작했다. 오전에 눈 소식이 있을 거란 건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 눈 소식이 있는 날이면 하늘은 전쟁을 준비하는 장수들의 분주함처럼 일찍이 눈구름을 대동하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정작, 전야前夜까지도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잠깐 먼 눈을 판 사이. 하늘은 누군가의 그림자에 가려지듯 햇빛도 가려지며 어두워지더니, 몸을 부풀린 눈구름이 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린다는 말보다 쏟아진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만큼, 결정이 눈에 훤한 눈이 아득히 쏟아져 내렸다. 흰색의 눈이 갈색의 흙먼지로 뿌옇게 변한 아스팔트 위로 내렸고, 간판 위 각양각색으로 치장한 글자들의 틈새로 쌓여갔다. 원색을 뽐내던 수많은 것들이 흰색의 눈에 가려지며 옅어지고 이내 가려졌다.


시뷰 / 와카레미치


대부분의 색들은 흰색과 함께 할 때 마치, 원기를 다한 듯 옅은 색으로 바뀌어 간다. 원색을 진하게 뽐내는 것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태초부터 흰색을 고유하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확실한 원색보다는 모호한 파스텔톤이 겨울이라는 계절에 더욱 깊게 동화되는 것 같다. 마치 원색은 받아 드릴 수 없다고 겨울이 우리에게 언질을 놓는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언제부턴가 고집 센 단색들도 떠오르곤 했다. 손도 대지 못할 만큼 차가운 파란색,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흰색, 헤어 나올 수 없이 깊은 검은색 같은 것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차 붉은색을 선명히 발하며 붉은 혈흔을 남기는 딸기로 점철됐다. 극적인 날씨의 변화를 누렸던 그날과 너무나 닮았던 딸기. 자신의 색에 어지간히 고집을 부리는 퍼런 계절에 엉뚱하게도 붉은 모습을 내보이던 녀석이 떠올랐다.


시뷰 / 와카레미치

딸기는 봄이 제철인 과일임에도 겨울에 출하량과 소비량이 가장 활발히 서로를 주고받는다. 그것은 제 몸을 보호할 단단한 외피가 없어 햇빛과 바람, 온도에 자신의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야 하는 약점 때문인데, 오죽하면 자신이 태어나는 봄날의 체온에도 살이 뭉그러질 정도니, 가족에게 미운 받던 오리의 신세와 다름없다. 분명 향과 맛이 뛰어나 남녀노소 구별 없이 사랑하는 과일이라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그런 연약함이 늘 사람들을 아쉽게 만들기도 했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 하우스 재배가 가능해 짐에 따라, 농민들은 홀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딸기를 계절에게 부탁하듯 차가운 겨울로 그 재배시기를 인위적으로 앞당겼고, 더 이상 따뜻한 봄에 의해 이 연약한 딸기가 다칠 일은 없어졌다. 되려 겨울이라는 이점을 살려 더욱더 선명한 붉은 빛깔을 띠며 우리의 식탁까지 생기를 유지한 채 올라온다. 철이 뒤바뀐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딸기 중에서 '눈의 향'이라 말하는 '설향'이라는 종자를 좋아한다. 유독 그 딸기의 맛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단순히 '설향'이라는 어감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아닌, 이름이 가진 뜻과 이름대로 살아가는 생生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으로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기에 특별했고, 가능성을 열어준 시발점이었기에 더 깊은 뜻을 담았던 '설향'이란 딸기는 가녀린 이름과 달리, 탄생의 배경은 순탄치 않았다.


시뷰 / 와카레미치


딸기의 원산지는 아메리카 지역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개량된 것은 18세기 무렵 유럽인에 의해서였지만, 우리나라에도 오래전부터 딸기와 비슷한 '산딸기'가 꾸준히 자생되어 왔고, 현재까지도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통상 우리들이 딸기라 하면 떠올리는 그 과일만은 우리나라에 없는 작물이었고,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일본을 통해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딸기를 '서양 딸기, 양 딸기'라 부르기도 했다.


다른 과일처럼 오랫동안 우리 땅에서 키우며 재배기술을 정제하고 발전시켰던 것과 달리, 딸기는 앞서 말했듯 상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육종기술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수년 전까지 딸기의 품종 대부분을 일본 품종에 의지 한 채 매년 막대한 로열티를 일본에 지급했었다. 하지만 2000대 중반에 우리나라가 일본 품종을 대체할 수 있는 한국산 딸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2005년까지만 해도 딸기시장에서 9.2%에 불과했던 국산 품종 점유율이 설향딸기를 필두로 매향, 죽향, 킹스베리, 금향 같은 토종 딸기가 지속적으로 선보여지면서 현재 국내 딸기 시장의 국산 품종 점유율은 94.5%를 기록하고 있다.


시뷰 / 와카레미치


단단한 식감과 함께 밀도 높은 신맛과 단맛을 자랑하는 '죽향', 모양이 균일하고 과실의 무게가 무겁고 단단해 우리나라 딸기 수출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향', 불변의 법칙처럼 자리 잡은 '딸기=빨간색'이라는 관념을 탈피한 흰색 딸기인 '만년설', 작년부터 시중에 보이기 시작해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킹스베리' 등 현재 우리나라 딸기 시장은 이미 유통되고 있는 국산 품종만으로도 소비자의 기호를 감당할 수 있지만, 농업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품종의 다양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이전까지 국산 품종을 안정화하는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더 많은 품종을 선보이는 것으로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히는데 집중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새로운 종자가 등장하고 사람들의 눈이 모두 새로운 곳을 응시한다 해도 여전히 나는 '설향'이 좋다. 딸기라는 과일을 크게 좋아하지 않음에도. 되려 더 단단한 과육과 진한 맛을 자랑하는 건 죽향이나 육보, 장희쪽임에도 '설향'이라는 딸기에 더 정을 붙이는 이유는 이름대로 살아간다는 우리나라의 옛 속담을 용청聳聽하는 딸기의 면모 때문이다.


시뷰 / 와카레미치


한글은 그 뜻이 수면 위를 떠다닌다면 한자는 그 뜻이 수심을 유영하며, 일생에서 몇 차례만 수면 위로 튀어 오른다고 설명한다. 한글은 있는 그대로 글자와 글자를 결합해 곧장 뜻을 전하지만, 한자는 '명明'은 '밝다', '애愛'는 '사랑'처럼 글자 하나에 뜻을 숨겨, 더 많은 말을 전달하려는 욕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글과 한자 모두 뜻을 전하기 위해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 그것으로 이름 지어진 우리는 그저 딸기처럼 살아가면 될 뿐이다. 바른 성품으로 세상을 복 닫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진 내 이름도 딸기와 다름없다.


과거, 추운 겨울밤에 딸기를 찾던 아내를 위해 찬 바람을 뚫고 나갔던 남편의 간절함을 거창하게 품고 등장하는 '설향'도 결국에는 그 이름처럼 매년 겨울에 눈 속에서 피어나 우리에게 찾아올 뿐이다. 약간의 때에도 한 방울의 물감에도 탁해질 순백의 눈을 뜻으로 품은 설향은 자신을 닮은 새로운 것들이 제자리를 꿰차더라도, 묵묵히 시작을 주도했던 자신의 영광을 간직한 채 매년 겨울이면 눈 속에서 향을 피울 뿐이다.


우리도 그러면 그만이다. 시간은 단순한 허상일 뿐 그 시간을 쌓아내며 나이라는 숫자를 쌓는다 해도, 그렇게 점차 자신의 자리가 새로운 누군가에게 조금씩 떼어지고 축소되어도, 스스로 걸어왔던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채 묵묵히 그 자리를 걷고 훗날 멋지게 돌아서면 그만이다.


단맛이나 신맛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둘의 중간을 유지하는 설향 딸기는 어느 맛도 진하게 내지 않아 때론 싱거운 딸기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눈이라는 제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붉은색을 자랑하며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드는 흰 눈을 말하는 설향. 우리와 가장 닮은 작물일 것이다.




시뷰 / 와카레미치 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농산물 구매 관련 문의 http://pf.kakao.com/_djzeC

※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aq137ok

※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_seong_bae/ / https://www.instagram.com/_siview/

※ aq137ok@naver.com

'FRUIT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의 멜론  (0) 2019.01.08
그녀의 대추  (0) 2019.01.08
'눈의 향'이라 불리는 딸기  (0) 2018.12.30
딸기 / 눈 속에 담긴 봄  (0) 2017.11.24
감홍 / 너는 누구보다 달콤했다.  (0) 2017.10.28
귤 / 너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겠구나.  (0) 2017.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