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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왔던 말

우리를 연결하는 오지랖

"학생 앞을 보고 걸어야지"


깜짝. 단호한 어조와 함께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려 정면을 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것이 아닌 인도의 끝을 걷고 있는 나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곧 중년의 아저씨가 옆을 스쳤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안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인도를 벗어났거나 가만히 서있던 구조물 혹은 사람과 부딪혀 다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날은 20살 언저리에서 21살을 기다리던 겨울쯤이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비슷한 순간을 나는 숱하게 경험했을 것이며, 그에 버금가는 횟수로 목격도 했을 것이다. 


다음은 그 기억의 일부다.


언젠가 스크린 도어가 미처 설치되지 못한 지하철 승강장 위에서 책에 집중하던 한 고등학생을 발견했고, 그의 발끝은 선로 쪽 난간에 꽤나 가까워져 있었다. 저대로 가만히 서있는 것도 불안한데, 한걸음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귀띔을 해주어 뒤로 물러서게 해야 했기에 다가갔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어떤 남성이 소년의 뒤로 여유로운 공간을 두고 굳이 소년의 앞을 지나는 것으로 그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조금 놀란 학생이 스친 남성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책에 집중하려 할 때, 자신이 선로에 가까이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장 발을 두세 걸음 뒤로 물렀다.


겨울의 늦바람이 불던 올 3월에 버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다 잠시 신호에 멈췄을 때의 일도 이와 결이 비슷하다. 반대편 도로에서 보라색 털모자를 푹 눌러쓰신 할머니가 지류가 가득 실린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이 실린 리어카는 할머니의 힘으로는 수월하게 밀리지 않아 나아가는 속도가 마냥 더뎠는데, 뒤에서 걸어오던 두 명의 여자가 발을 보채며 도로로 나오더니 리어카의 뒤를 말없이 미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한 번 뒤를 보시더니 미소를 지으셨고, 금세 언덕의 정상까지 리어카를 끌어올렸다.


시뷰 / 와카레미치


타인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거나 참견하는 사람을 가리켜 "오지랖이 넓다"라고 표현한다. 몇몇의 사람들이 소위 '부리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오지랖을 남용하는 것을 볼 때면 개인의 삶을 저리 타인을 간섭하는데 소모할 때, 자신의 삶에는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런 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부리는 오지랖만큼 자신을 향하는 오지랖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외로움이라는 우물이 차오르고 차오르다 넘친 것을 타인에게 알리기 위한 하나의 신호로써 오지랖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오지랖에 대한 시선을 꽤나 부정적으로 갖고 있었고, 지금도 백 프로 나아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오지랖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구성된 사회는 수백만 년을 이어오고 있고, 그 사이에서 인간의 지력은 수십 배로 커져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편의를 실현시키고 현상을 규명했다. 그렇게 이전까지 인류의 맹목적이었던 의식주衣食住가 해결되면서 점차 이기심은 이타심으로 바뀌어 나간 것이라 생각한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배가 불러야 여유가 생기고, 여유는 주변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그러니 성선설과 성악설로 본디 인간은 선했다거나 악했음을 논하기에 앞서 인간은 이기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회의 발전이 자연스레 이기심에서 이타심을 낳았고, 이타심은 오지랖을 불러왔다.


누군가는 이 말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타심과 오지랖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이타심은 이기심과 대치되어 타인의 이익을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타심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참견과 간섭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은 타인에게 확실한 이익을 남긴다. 반대로 오지랖은 이익이 아닌 그저 타인의 가슴에 제멋대로 응어리 하나를 안겨 가슴의 호흡을 막는 것이라 말한다. 되려 오지랖을 이기심에서 시작된 예의 없는 장난이라고 평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타인을 위해 마음을 쓰는 이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앞서 여유가 곧 주변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다준다고 한 것처럼, 나는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든다. 이타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랑이나 우정, 가족의 정처럼 애愛라는 특별한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나 연명하는 멸종 위기의 가치로 변모했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이는 찾기 힘들어졌고, 이 사실에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앞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이를 보며 말없이 그를 무시하고, 난간 앞에 서있는 학생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않으며, 리어카를 끄는 노파의 모습을 무시한 채 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떠한 말도 달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는 더 이상 최초에 사회를 구성했던 사람들의 의지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만 남은 모순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저 사회에서 태어났기에 의무적으로 이것을 등에 엎고 살아갈 뿐이다.


그럼 다시, 몇 문단을 거슬러 오지랖에 대해 재차 묻는다. 이타심이라는 특별한 가치와 달리 범상한 오지랖은 모두 한데 모아 나쁘다 말해야 할까. 말없이 스치는 행동이나 퉁명스레 던지는 말들이 누군가를 돕고 살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이타심이라는 여유보다는 오지랖이라는 참견에서 비롯된다.


시뷰 / 와카레미치


이타심을 오지랖이라는 단어와 대치시켜 서로 다른 말인 것처럼 말했지만, 어쩌면 이 둘은 같은 것이며 그저 서로 다른 이름으로 공간을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利 이로울 이'와 '他 다를 타' '心 마음 심'이란 뜻 그대로의 고매한 이름은 애愛를 나누는 관계에서만 쓰이며, 연이 없는 관계에서는 '오지랖'이라는 애석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사랑만으로 사회를 유지할 수는 없다. 사랑은 특별하고 절충 없는 확고한 애정을 갖는 만큼 타인을 고려하기 힘들어진다. 사랑은 내 안에 들어온 이들만이 전부니까. 그래서 사랑은 모두가 하는 가치이지만 독단적이며, 독단적인 모두를 연결하는 것은 이타심의 다른 이름인 '오지랖'이라 생각한다.


우리를 알게 모르게 서로 돕고 살리게 하는 가치. 몇몇 악의적인 오지랖이 흐려서는 안 되는 말일 것이다.




시뷰 / 와카레미치 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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