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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왔던 말

도깨비의 마지막 장

생生에 대한 의지와 연명延命하기 위한 노력과 갈망은 끝이라는 죽음의 존재를 통해 발현된다. 즉, 죽음이 있기에 생生은 동력을 갖고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사람은 시간과 중력을 쌓아가며 늙어갈 수 있다. 그 안에서 보람과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렇기에 생生을 영원으로 산다는 건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이었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때와 부유함에 차고 넘치던 여유도 긴 생에서는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가는 낮의 마지막 장이나 수십 년에 한 번씩 뜬 다는 커다란 달도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아름답다 말하던 것과 행복이라 짚어둔 순간들도 결국은 한정된 생生에 한해 주어진 축복과 같은 것이었기에. 나를 피한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찬란했으나 이렇듯 쓸쓸하게, 산다고 말할 수 없는 생生을 이어가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을 나눈 벗들의 죽음을 끝없이 목격했다. 나 홀로 멈춘 시간 속에서 늙어 죽어가는 그들을 보는 일은 끔찍이도 잔인하고 미치도록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었다. 생生을 거두어 달라 당신에게 탄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참으로 무심했다. 어찌 나를 편히 잠들게 하지 않는 것인가. 어찌 이 저주 같은 생生을 한순간에 바꿔버릴 사람을 나에게 내린 것인가. 나는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교복이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네 번에 생生이 있다 말하던 저승사자들에 말을 엿들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죄 많은 전생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불행할 수 없다고. 어미를 9살의 나이에 여위였고, 이모와 사촌들의 핍박 속에서 힘겹게 자라왔으며 그 사이에서 영혼을 보는 탓에 불경한 아이라 취급받았다. 집안에서 집 밖까지. 소녀는 모든 순간 외로운 아이였다. 그러나 처음 그녀를 본 날 나는 부정한 기운 느끼지 못했다. 그저 신비로웠고, 나를 불러낸 의아한 힘과 슬픔을 개의치 않아하며 말하는 대범함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영생營生을 시작한 이래 누군가를 궁금해 해본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나는 누군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궁금하다는 것은 관심이며, 관심은 각각의 모양으로 비어진 퍼즐판에 퍼즐 조각이  된 누군가를 끼워 맞추는 것이었으니. 그 조각을 잃어가는 괴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그녀는 나에게 궁금한 사람이 되었을까. 소녀의 부름이 기다려졌고, 기다리는 동안 슬퍼져 비를 내리게 만들었다. 그러다 소녀를 만나면 비가 개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수한 은행잎이 가을에 주저앉던 날, 제비꽃 같던 소녀가 천천히 나에게 걸어올 때 짐작할 수 있었고, 술기운에 정신이 느슨해지던 밤 가슴에 박힌 검이 통증을 물어 올 때 확신했다. 사랑이란 것이 찾아온 것이며, 무심했던 신神의 무정無情한 예언이 실현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잔인한 신神이라는 작자에게 나는 참으로 죄 많은 이였나 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조금이라도 덜 사랑할 때 소녀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또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사랑의 크기는 빚처럼 쌓여갔다. 전지전능까지는 아니어도 못할 것이 없던 나에게 사랑은 유일하게 손쓸 수 없는 장애였다. 속절없이 사랑에 무너져 갔다. 신神의 의도인지 나의 자의 인지 모를 힘에 의해.



"앞으로 100년만 그녀의 곁에서 사랑이었다는 것을 숨긴 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백 년을 산 어느 날, 날이 적당한 어느 날 첫사랑이었다 고백하겠습니다. 너를 만난 찰나가 산다는 것이 저주였던 나에게 살고 싶었던 이유가 되었다고. 그러니 허락해주십오. 조금만 더 있다 가겠습니다"


하지만 무정無情한 그는 나의 기도를 들었음에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살면 소녀가 죽는 것이었으니 효용가치를 증명해야만 살 수 있던 소녀는 나를 죽여야만 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내려진, 사랑이라 말하는 저주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던진 운명이라는 질문에 죽음으로 답했다. 그녀를 살게 하기 위해.



"신神이여 핑계를 준비해두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십 년 뒤, 살아 돌아온 나와 달리 이번에는 어른이 된 소녀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생生에 내려진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너에게 내린 운명은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났으며, 나는 이제 너에게 운명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직 그 생生에 내려진 운명에 대한 답을 받지 못했다. 얽힌 운명은 한 번의 죽음을 통해 풀려 나가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무정無情하다 여기지 말아라. 소녀에게 첫 번째 생生은 가혹했으나 앞으로 남은 세 번의 생生은 너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나 또한 빌터이니. 생生에 대한 기억은 거두지 않겠다. 그녀 또한 망각을 원치 않아 왕여가 건넨 차를 마시지 않지 않았는가. 남은 세 번의 생生은 그녀가 선택한 대로 온전히 그대들의 시간으로 두겠다."


우리는 결국, 찬란하고 쓸쓸하게 각자의 생生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생生을 맞이하며 만났다. 앞으로 삼백 년. 그녀에게 남은 세 번의 생生을 함께 꽉 채운 뒤 돌아갈 것이다. 비로 눈으로 함께 내릴 것이다.




시뷰 / 와카레미치 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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