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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UIT . FOOD ESSAY

동지팥죽의 거짓말

겨울을 닮은 차가운 바람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날아온다. 이미 한낮에도 온기는 결핍되었고, 햇빛마저 없는 날이면 옷이 물에 빠진 듯 냉기를 머금는 탓에 움직이는 내내 살갗이 시리기까지 하다. 하얀 눈과 따뜻한 옷감으로 몸을 꾸미는 겨울이라는 계절은 감상하기에는 좋지만, 보내기에는 이런 이유로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11월의 중간은 아직 겨울이라 할 수 없는 모호한 탈피의 계절이다. 길가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말라 가는 것을 보며 겨울의 도착 일을 손으로 세는 정도인, 아직 가을에 더 가까운 시기이다. 하지만 오늘, 작은 방앗간 앞을 지나며 수북이 쌓인 팥을 보았을 때, 겨울의 입김이 가장 매서운 날이 떠올랐다.


욕설과 언성을 높이는 것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사람만큼 무서운 상대가 또 있을까 싶지만 때론, 어떤 말도 없이 날카로운 눈빛과 표정으로 위협하는 사람이 더 무겁게 상대를 압도한다. 겨울에 찾아오는 동짓날이 딱 그런 사람과 같다. 동지冬至라 말하는 12월 22일. 얼마나 춥고, 얼마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냐는 중요하지 않다. 차가움을 말하는 겨울과 함께 길어진 밤이 소리 없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날. 우리는 겨울이라는 존재의 분위기에 압도 되어 버린다. 몸을 웅크리게 하는 추위와 함께 낮보다 긴 밤을 보내야 하는 겨울. 되려 여름에 공포영화나 귀신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겨울에 그것들을 앞세우는 것이 더 정답인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밤은 예로부터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영적인 것들이 활개를 치는 시간으로 치부되었고, 팥은 그것들을 물리치며 우리를 지키는 음식이라 알려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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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은 민간요법처럼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사귀邪鬼를 물리친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 식품이었다. 당장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때를 말하라 하면, 어린시절 어머니나 할머니께서 언질해주셨던 것을 시작으로 1990년 대 말에 유행했던 만화 영화 '꼬비 꼬비'에서 도깨비의 약점이 팥죽이었던 것과 심령 프로그램에서 무속인들이 팥을 던지며 "악귀야 물러가라"를 외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팥은 어떻게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을까.


여러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오래전부터 붉은색은 귀신을 물리치는 색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모든 종자의 팥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장 보편적인 종자인 '충주팥'이 짙은 붉은색을 띠기에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는 팥 그 자체의 얘기가 아닌, 동짓날이면 끓여 먹는 '동지팥죽'의 이야기이다. 팥은 중국이 원산지인 만큼 동짓날 팥죽을 끟여먹는 풍속은 중국에서 전래되었는데, 중국의 '형초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공공 씨'라는 인물의 망나니 같던 아들이 동짓날 죽어 역귀疫鬼가 되었고, 동짓날이면 찾아오는 그를 쫓아내기 위해 생전에 싫어했던 팥을 이용해 죽을 쑤어 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붉은색이라는 외적 특징과 중국에서 전해진 사연 있는 풍속이 뒤섞여, 팥은 귀신을 물리치는 음식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이제는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나 할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짜였지만 성장하며 미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저 미신의 이면에 그랬을 법한 사연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여전히 우린 생일에는 미역국, 복날에는 보양식, 동짓날은 팥죽을 먹는다. 언젠가 겨울에 시장의 한 죽집에서 팥죽을 사는 한 여자가 "왜 팥죽을 사요"라는 딸아이의 질문에 "동짓날이면 팥죽을 먹어야 아프지 않고 귀신도 물러가기 때문이란다"라는 대답을 하던 것을 보며, 거짓말이면 거짓말일 전설이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기도 했다.


거짓이 진실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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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귀했던 당시, 동짓날이면 가장 긴 밤을 보내야 했던 조상들은 밤보다 짙은 집 안의 어둠 속에서 실체가 없는 것들에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음식과 같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 써 그것을 먹는 것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안심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노년의 어른이 아이들에게 전했던 미신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팥죽이 귀신을 몰아낸다는 효험을 가졌다는 거짓 안에는, 어른이 아이에게 희망만을 전하고 싶었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작은 현상 하나에도 큰 두려움 느끼는 건 당시의 어른도 마찬가지 였지만, 아이들에게 만큼은 평화를 지켜주기 위해 진실보다도 더 오래 전승될 따뜻한 거짓말을 만들었던 것이다.




시뷰 / 와카레미치 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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